Calendar 달력
2017년 9월에 8주간 아버지 모시고 고국방문후
2019년 5월에 3주간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그후 여유없는 2019년 9월달에 짧은 2주간 처와 함께
아무 착오없이 고국방문을 해서 지금 코로나로 꼼짝
못하는 세상에서는 낭만적인 꿈만 같게 생각된다.
어머니 모시고 갔을때는 일주일 후에 여동생 가족이
합류해서 스케줄 잡고 안내한다고 힘든적도 있었다.
여동생 딸은 그당시 대학생으로 여름방학이여서 동반 할수 있었다.
173 cm의 큰 키로 순수하게 아빠 청바지를 즐겨 입고 다녔다.
여동생이 말하길 키가 크다고 하면 싫어하고 신발도
밑바닥이 없는 납작한 스타일을 신고 다녔다.
하나 이상한건 카메라에 대해선 모르는 나한테는
professional 하게 보였었다.
2주 남직한 여행중에 사진을 담는 것도 본 기억도 없고
사진들을 담아서 보여준 적도 없었다.
6.25 피난후 큰외삼촌과 외할머니가 경남 진해에서 오래 지내셨다.
1967년쯤 외삼촌이 월남 파견으로 다낭에 몇년 가셨을때
외할머니 혼자서 외롭게 지내시기에 어린 여동생을 보냈다.
여동생은 항상 바쁘신 할머니 생활에 같이 있는 개와
시간을 자주 보내면서 몇년 외롭게 지냈다.
저 멀리 기차가 보이면 엄마가 올것 같아 마냥 기다렸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 후 파피용 강아지를 사서 키우다
혼자 외롭게 보여서 치와와 강아지를 한마리 더 사서
집에 방문하면 집안에 널려있는 사진들은 두 강아지 모습 뿐이였다.
2-3년 후에 여동생이 딸을 나아서 가보니 개 사진들은
흔적도 없고 즐비하게 귀여운 딸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내가 봐도 찬밥 신세가된 두 개가 애처럽게 생각되었다.
여동생 딸은 어릴때 귀엽고 개구장이였다.
외동딸로 자라서 그런지 우리가 가면 애들하고
놀기에 바빴고 잠시도 쉬지않고 활발했다.
여동생 가족이 뉴져지에 살았을땐 어머니가 가끔
가서 돌봐주곤 했지만 캘리포니아로 이사간후
왕래가 없다가 막벌이 하는 여동생 부부가 힘들어서
한번은 내 큰애와 어머니가 한달간 가서 딸을 돌봐줘야했다.
어머니는 여동생 가족을 방문할때마다 떡을 손수 자주
만드셔서 여동생 딸은 떡보라 할 정도로 떡을 지금도 좋아한다.
여동생 딸은 자상한 자기 아빠를 잘 따랐고 지금도
아빠 청바지를 입고 다니며 절친한 사이 같이 보인다.
어느듯 잘 커서 성숙한 여성이 되었고
같이 게임을 하면 옛전 장난기가 보였다.
작년 5월에 버클리에서 컴퓨터 전공으로 졸업 후
좋은 첫 직장을 구했고 원래는 뉴욕시티에서 첫 회사를
다니게 됐는데 covid-19 pandemic으로 회사에서
안전을 생각해서 캘리포니아 집에서 1년 근무하기로 했다고 한다.
새해가 지나면서 2-3개 달력을 얻는데
올해는 내가 해마다 기부하는 작은 USO calendar
달랑 있어 코로나의 세계의 상막함을 느끼는데
여동생 딸이 지난 짧은 한국방문에서 담았던 사진들을
잘 정리해서 달력을 만들어 보내왔다.
너무나 반가왔고 최고의 선물 같았다.
좋아서 한국에 친척들도 보내달라고 부탁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