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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할아버님을 찾았습니다!!!

외조부께서는 목사로 활동하시다가 일제강점기 시절은 독립운동 가담으로 어려운 가족 생계는 외조모가 하셔야 했습니다. 평양에 가족이 살면서 광복을 맞았지만 공산권이 수립되면서 외조부는 단신으로 1949년에 이남 하셨죠. 그후 상인을 통해 값어치 되는 물감을 보내왔다고 하셨습니다. 한국 전쟁이 터지고 외조모는 가족을 거느리고 일사후퇴때 너무나 힘든 피난을 오시다가 작은 외삼촌을 잃어서 1971년에 찾으셔서 1972년에 큰 외삼촌이 미국으로 이민 가시고 1975년에는 저희 가족도 합세 했습니다. 외조모는 친정인 창원에 갔지만 고된 생활은 계속 이였습니다. 피난 후 몇 년 동안 수소문하고 신문을 통해 외조부를 찾으려고 했지만 행방불명 이였습니다. 그러다 이번 고국 방문 시 한 조카가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을 접..

친척 2024.10.29

2년만에 다시 가는 여행..

치아 상태는 어릴 때부터 안 좋았다. 아버님이 강원도 양구 방산 목장 마을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하실 때 어렴풋이 만 4살까지 있었던 기억이 있다. 동네 친구들 하고 걸어 다니면 작은 마을을 지나서 시냇가가 나오고 큰 통나무 하나로 된 다리를 지나면 군 기지 정문이 나왔다. 좌측으로 가면 산등선을 따라 철조망 뒤로 총을 매고 있는 군인들이 보였다. 민간이 사는 최전방이라 전기와 상수도 없었다. 북한의 몇명이 남침도 자주해서민간인의 사망자도 나오고 지프로 가다가 길 한가운데 큰 돌이 있어서 치우다가 납치된 장교도 있었다. 남한에서도 스파이를 보내고 어떨 때는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다. 대부분 원주민은 3팔선에서 한참 이북이라 징병으로 전쟁 때 끌려간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도 있었다. 어느 날 ..

나의 이야기 2024.08.14

너무 아팠다

태어나서 너무 힘들 정도로 아픈 건 1986년 Port Washington Long Island에서 혼자 살 때였다.  그 당시 한국회사에서 1년 근무했는데 회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로 다락방에서 부엌도 없고 마주편의 방과 같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 뿐 이였다. 대부분 잠만자고 가끔 전기를 사용해서 간단히 라면을 해 먹었고 작은 테이블에 의자 2개와 침대 옆에는 쌓아놓은 신문만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회사에서 점심을 사주었고 저녁 회식이 자주 있어서 부엌의 필요성은 못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독감이 걸렸고 전화도 없어서 도움을 받을 수 도 없었고 너무 아파서 약국에도 갈수 없었다. 침대에서 누워 온몸이 아프면서 열이 심하게 나면서 악몽에 사경을 헤 매고 있었다. 가끔 엉금엉금 기어서 라면을 만들어 ..

나의 이야기 2024.07.09

분열되는 세계와 경제침체

그동안 세계가 100년만에 오는 너무나 이변적일로 변해가고 있다. 사회, 정치, 경제는 30년간 보편적으로 무난했던 세계화가 종말을 내리고 분열과 양극화 되는 시대로 들어가고있다. 금융시장은 더 심하게 작용했다. 미국 대부분 개인 저택융자를 대표하는 30년 mortgage rates가 국채 10년 금리에서 2-3%를 올려서 적용된다. 국채 10년 금리는 1981년 16% 가까운 이자에서 지속적인 disinflation으로 2020년 8월에는 0.5%로 내려가서 현금을 위주로 한 은행의 적금은 거의 이자가 없었다고 해도 무관했다. 지금은 국채 10년 금리는 4%가 넘어서 당분간 3.75%-4.25%로 공간에서 움직이고 30년 mortgage rates가 낮았을 때는 3.5% 였으나 6.75%로 2배 가까운..

오랜만에 여행..

코로나로 갇혀서 지내는 동안 주위에 많은 변화가 왔다. 미국시골은 마스크를 안쓰는 편이나 지금도 쓰는 사람들이 보인다. 백신을 4번이나 맞았지만 몇달전에는 귀찮고 바이러스도 약해졌을 거라는 생각으로 피했다. 그러니 2달전에 직통으로 걸려서 며칠간 고생하고 2주간만에 회복되었다. 2번이나 한국방문을 연기하면서 지연된 여행은 가벼운 마음이 아니였다. 9월4일 2022년 케네디공항에서 출발로 2시간 인천공항 layover때 대구자형을 만나서 캄보디아로 DESTINATION을 잡았다. 보통보다 1시간 일찍 출발한다고 줄서서 기다렸지만 1시간이상 기다렸다. 그전에는 북극으로 해서 러시아,몽고, 중국으로 가는 노선이였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알래스카 해안가로 가는것 같았다. 가는 도중 위급한 승객이 생겨서 Anch..

나의 이야기 2024.01.29

다부동 전적기념관

4년전 아버지와 고국방문 당시 대구자형 안내로 자형 고향 봉화에 며칠을 묵고 있다가 대구로 오는길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안동 봉정사를 들리고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은 무기와 훈련이 부실한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승리하여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7월 5일에는 오산 전투에서 미군까지 격파하고 7월 24일 대전을, 7월 말 목포와 진주, 8월 초 김천과 포항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전투가 몇 차례씩 벌어졌다.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다부동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

한국방문 2021.06.23

큰아들

콜로라도 Fort Carson에 근무할때 큰애에게 물었다. 다음에 어디로 가서 근무 하나고 하니 화와이 아니면 씨애틀 워싱턴 주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 문화와 언어도 배울겸 한국에 가기를 바랬다. 그런데 3년전쯤 대구에 주둔한 미군 친구를 방문한 뒤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격려했다. 큰아들은 미육군대위로 한국을 지원해서 2019년 2월초에 파견됐다. 우리도 한국을 방문하면서 두번이나 공동구역지역 JSA을 찾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마비되기 전에 시간 있으면 여행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만리장성에서 마라톤에 도전을 했고 마카오에 가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번지점푸도 시도했다. 여러번 필리핀으로 가서 즐기면서 스쿠버 다이빙 면혀증도 땄다고 한다. ..

가족 FAMILY 2021.05.19

온 가족이 백신 접종 VACCINATION을 맞쳤다.

미국과 유럽은 방역을 너무 못해서 백신이 없었으면 답이 없었다. 대부분 과소평가의 정치 지도자들이 큰 문제였고 심각성이 부족한 국민인식이라 본다. 미국은 연령이 65세 이상 되신분들이 전체 인구에 17%도 안되지만 누적 80%의 사망자가 나와서 의료진에 종사하는 분들을 합쳐서 20%도 안되는 인구를 백신을 받으면 100년만에 있는 대재앙을 어느정도 수습할수있다. 미국은 주마다 주지사에 의해 행정을 다르게 해서 pandemic에 대한 방역과 백신 접종에 많은 차질이 보였다. 뉴욕주는 의료진들, 교사, 경찰, 소방관, 65세 이상, 대부분 공무원들, 손님 많이 상대하는 종업자, 그리고 건강에 큰 문제 있는 시민.. 그러니 뉴욕주 인구 반이 해당 돼서 팔순이 넘는 부모를 백신 접종 예약 하기 위해 매일 6주간..

가족 FAMILY 2021.04.17

Bakery 빵

오래전부터 뉴욕시티 가면 항상 들리는 한인 제과점. 아니면 한아름 슈퍼마킷에 들려 20-30불 여러가지 빵들을 사서 며칠간 먹으면서 즐겼다. 미국 제과점은 너무 달기만 해서 고소하고 달콤한 한인 제과점에서 나오는 빵들이 너무 좋았다. 특히 단팥빵과 찹쌀 도나스는 나에게 행복을 주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뉴욕시티를 못가서 제일 아쉬운 것은 한인 제과점에서 나오는 빵들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미국 슈퍼마킷에서 일주일에 한번 식빵을 사서 아침은 계란 푸라이와 같이 먹고 점심도 빵 한조각 위에 Gouda cheese를 언져서 토스트 해서 따끈한 우유와 먹으면 아주 간단히 즐겨 먹는다. 여기에 있는 한인 슈퍼마킷은 한인 제과는 없고 비슷한 프랑스에서 수입한 빵이 가끔있어 사서 먹기도 했다. 그런데 포장된 빵 성분 ..

나의 이야기 2021.03.02

Calendar 달력

2017년 9월에 8주간 아버지 모시고 고국방문후 2019년 5월에 3주간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그후 여유없는 2019년 9월달에 짧은 2주간 처와 함께 아무 착오없이 고국방문을 해서 지금 코로나로 꼼짝 못하는 세상에서는 낭만적인 꿈만 같게 생각된다. 어머니 모시고 갔을때는 일주일 후에 여동생 가족이 합류해서 스케줄 잡고 안내한다고 힘든적도 있었다. 여동생 딸은 그당시 대학생으로 여름방학이여서 동반 할수 있었다. 173 cm의 큰 키로 순수하게 아빠 청바지를 즐겨 입고 다녔다. 여동생이 말하길 키가 크다고 하면 싫어하고 신발도 밑바닥이 없는 납작한 스타일을 신고 다녔다. 하나 이상한건 카메라에 대해선 모르는 나한테는 professional 하게 보였었다. 2주 남직한 여행중에 사진을 담는 것도 본 기억..

가족 FAMILY 2021.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