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

외할머님의 20주년을 맞아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William Beak 2016. 5. 26. 00:17


외할머님의 20주년을 맞아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게 큰어르신분은 단지 외할머니시다.


친할머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친할아버님은 내가 3학년 방학때 한번 뵌 기억이난다.


삿갓을 쓰셨고 옛날 조선시대때 입으신 한복에 손을 뒤로하고 걸어 가시는 모습이었고

 

한번은 대구에 집을 장만하고 어머니께서 오시라고 하셔도 잠자리가 불편하니 못오신다고 사양했다 한다.


외할머니의 다가오는 20주년 기일을 그동안 부모님, 외삼촌님, 이모님

그리고 내가 보고, 느낀봐에 의해 간추려 적어 보기로 한다.

외할머님의 출생은 경상남도 상남이고, 1903년이다.

밑으로는 남동생을 두었고 위로는 언니되시는 분이 2-3명인줄안다.

서당이란 문턱에도 못가셨는데 남동생은 집에서 신학대학까지 보내주셨다고 하니

그당시, 그지역이, 그집안이 얼마나 남녀를 차별 했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당시 특히 여자는 출가외인 하에 철저히 새벽 6시 부터, 어릴때부터 일만 시켰다고 한다.

그러다 몇년 일본으로 처녀시절에 건너가 일을 하셨고 어느정도 일본사람들하고 대화 하는대는 문제가 없었다.

마침 고향에 계실때 평양에서 순방 오신 목사분과 인연이 다아서 결혼을 하게되었고

그전날 남동생 한테서 자신 이름과 집주소를 배운뒤 평양으로 출가 하셨다.


결혼하신뒤 자녀를 못가져서 일본에가서 수술을 한후 첯애를 30세가 넘어서 가졌는데 이분이 이모님이시다.

그다음 큰외삼촌, 어머니 그리고 작은 외삼촌이였다.

막내는 피난오다가 간난애기로 돌아 가셨다.

외할아버님은 평양과 신의주 사이에 두고있는 교회들을 다니면서 목회를 하셨고

그것으로 생개 유지를 못하여 외할머니가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셔서 겨우 집안을 꾸려갖다.

그런뒤 외할아버님은 만주를 거쳐 상해로 다니면서 해방 운동에 가담 하시다 감옥까지 가셨다.

외정시대는 일본 순사에 쫒기는 신세고 공상권이 들어서자 공상당 당원들 눈감시 아래

가족을 등지고 쫒기는 생활을 하시다가 625전쟁 1년전에 가족을 남기고 혼자 월남해서 행방불명 이였다.

그후 가족들은 찿을려고 남한에서 수소문 하고 신문을 통해서 했으나 영원히 나타나지 않으셨다.


외할머니는 해방이 된후 평양에서 변두리에 있는 일산집을 일본가족한테 인계 받아서

얼만큼 가족의 생개를 해결 했었다. 

언덕위에 있는 집으로 대지가 있어 둘레로 봉숭아 나무들이 있고

밭농사를해 장에 갔다 팔기도 하셨고 염소하고 닭들도 기르셨다.

저너머로 평양 모랑봉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런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니 닭들이 다없어지고 수소문하니 이웃 사람들의 짓이였고

그사람들의 살기를 느껴 온가족이 몰래 밤에 도망 나왔다.

그후 평양시내에 살며서 할머니 혼자서 힘들어, 이모님(15살) 도 기차에서 장사를 하셨다.

거기 있을때 장사꾼을 통해서 한번 월남하신 외할아버지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625가 터지고 일사후태때 가족이 피난길에 나섰다.


피난길에서 외할머니는 큰짐을 머리에 이고 오면서 쳐지고

한11살된 작은외삼촌은 작은가방만 들고 제일앞에서 걸어갔다.

몇일이 몇주가되고 그사이에 간난아이는 영양부족과 병으로 죽었고,

걸어서 내려오는 길가에는 폭격맞아 군데군데 시체가 보였다.

제일 앞에 걸어가는 작은 외삼촌은 다리를 먼저 건너 갔는데 아군이 후퇴하면서 그다리를 폭팔시켰다.

뒤늦게 온 나머지 가족이 다리에 도착했고 몇일간 끊긴 다리주변에서 찿으려고 했지만 행방을 알수 없었다.

몇달이 걸려 외할머니 고향에 도착했지만 누구하나 반겨주는 친척들이 없었다 한다.

한동안 있다가 진해로가서 정착했고 그동안 자녀들의 배를 굶기지 않을려고

자신은 일찍 먹었다고 하며 많은날을 허기진 배를  물로 채웠었다.

얼마쯤있다가 이모님도 시집을가서 더어렵게 생개를 해야 했었다.


한창 후에 큰외삼촌은 월남에가서 군대 트럭 운전사로 3년간 있으며 피땀흘려 돈을 모았고

어머니는 결혼하셔서 힘든 4년을 강원도 양구 방산면에서 보냈다.

할머니는 큰외삼촌이 월남에서 부쳐준 돈으로 많이 나아졌다.

그러다 외삼촌은 돌아오고 직업이 마땅치 않아 서울에서 방황하다가

어느 벤치에 누울려고 하는데 신문이 있어 보니 사람을 찿는다는 내용이 있어,

자세히 읽어보니 작은 외삼촌같아 신문사로 통해 열락이 다았고

서신을 한동안 주고 받고해서 확인한후 작은외삼촌은 1971년에 방문하였고

그다음해에 큰외삼촌은 미국에 이민을 가게된 동기가 되었고 우리가족도 1975년에 합류했다.


한편 외할머니 남동생은 목사로 한때는 큰교회에서 목회를 하셨고

전대통령 이승만이 다녔다고 한다.

그 교회가 서성로에 있어서 서성로 목사님이라고 부르고

자녀분 들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 의사, 약사까지 되었다고 한다.


운전 못하면 갈수없는 미국 시골 생활은 할머니 한테는 더힘들었을 것이고

어느 미국 사람하고 대화도 불가능했고 낱선곳에 낱선 사람들...

내자신도 미국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노고는 상상을 초월 했을것이다.

큰외삼촌 집에 방문 할때마다 "니 밥묵었나?" 하며 물어보시고

자주 "니 잘되라고 기도했다" 라고 말씀도 하셨다. 

한자와 영어 알파벳을 버리는 종이에 수만번을 쓰셨고 기도와 찬송을 자주 불르셨다.

선물로 옷을 사줘도 입든옷을 계속 기워 입으셨다.

한번은 내가 대학교 다닐때 문득 “내하고 한국에 같이가서 살자” 말씀하셨다.


내가 메모리얼주 (전물장병 기념일, Memorial Day) 에 큰기대 부풀어 일주간 휴가를 통해 친구 방문겸,

관광겸해서 알래스카를 (Anchorage, Alaska) 1996년에 갔었는데 밤 12약간 지나 도착하자,

그날 새벽에 할머니께서 서거 하셨다고 통보를 받았다.

당장 다음날에 돌아왔고 뉴욕시티에 도착하자 전속력을 네서

차로 한시간만에 (보통 한시간 반 걸림) 장례식장에 도착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내 기억속에 확실히 남겨두실려고 그랬었나 본다.


93세 생애를 맞치시고 마침내 편안한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목사님의 부인으로서, 목사님의 누님으로서 충분하지 않았는지, 얼룩진 역사속에,

남녀차별이 극심한 지방에서, 너무도 가혹한 그시절, 생존하기도 힘든 긴세월을,

꼭어머니로서는 해야될 사명때문에, 혼자서 외롭게 왔었고, 모든 아픔을 혼자 가슴에 앉은채 떠나야 했다.

어디 하소연 할수도 없었고, 누가 지켜봐 주지도 않했다.

그래서 가끔 혼자서 중얼거리고선 살며시 웃으셨다.

그래도 나중엔 고향을 가고파 하셨으니....


가슴 깊히 말한다. 나한테 큰어르신분은 단지 외할머니시다.

외할머니가 아니라 그냥 할머니라고 속으로 몇번이고 크게 외친다.

그리고 많이 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