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

20년 만에 찾은 작은 외삼촌 2

William Beak 2016. 9. 14. 02:48




20년 만에 찾은 작은 외삼촌 2

 

 

안경하신분이 작은 외삼촌

 

 


그런데 덴마크라는 나라는


24세 미만이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의 승인 하에 결혼식을 하는데


작은 외삼촌은 아무도 없어 여자 부모의 승낙 하에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 후


대학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다


이란성 여아 쌍둥이를 낳고 그리고 차 후 아들도 낳았다.


자녀들은 모두 덴마크 이름을 지었고


한동안 정신없는 생활을 이어 갔다.


결혼, 직장, 그리고


대학원까지 다녀 석사학위


Master Degree in Chemistry를 받았을 때 까지는


엄청난 고난이 뒤 따랐다.


RCA 회사에 다니다가 마침내


1969년 East Fishkill IBM (한때는 14,000명이 직원이 있었던 회사) 에


취직 했을 때는 처음 동양인 이였고


40여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일 하시게 되었다.


한 편 나머지 가족은


한 겨울에 임진강을 건너게 되는데


강의 얼음이 두껍지 않아 곳곳에서 강을 건너던


소와 사람들이 빠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피난민들은 밤을 기다려 하나 둘 건너가는 동안


흔희들 말하는 살얼음판 그 자체였다.


겨우 식구들은 목숨을 건져


한 달이 걸려서야 서울 입구에 도착하니


한국 군인들이 지키며 피난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하나하나 몸과 옷 안을 수색했다.


그리고 힘들게 외할머니 고향인 상남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반겨주지 않은 친척 들


오히려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부산이 나았을 거라고 한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찾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내 세월이 한 참 흘렀고


어느 신문사로 인해 서신으로 확인 후


20여년 만에 찾았다.


1971년 작은 외삼촌은 한국에 가족들을 보기 위해 방문하였다.


국제 시장 영화를 보면


여동생을 찾을 때 한 장면과 흡사하였다.


10월 중순 즘


그 당시 대연각 호텔에 불이 났다는 소식과


20여 년 만에 가족을 찾았다는 내용이 신문에도 보도 되었다.


그리고


KBS 방송사에 초대받아

 
외할머님 큰 외삼촌도 동행하였다.


그때 우리 가족은 대흥동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을 잃었다.


어머니의 비상시 모아둔 돈으로 살고 있어


우리가족이 재정상 제일 힘들었던 때가 그때 였다고 본다.

 

 

외삼촌과 함께 뒤동산인 노고산에서 찍은 사진

 

그 즘


작은 외삼촌은 우리가 있는 곳에 방문 하여


나한테도 선물을 주었는데


내 생전 처음으로 선물이라는
레고.

 

 

나한테는 무엇보다 제일 값지고 멋있는 선물이었다

 

 

몇년을 쓰면서 여러모양을 만들었고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레고는 덴마크말로 ' 놀다' 좋은 뜻과 유래가 있었다.  


그리고


비좁은 곳에서 하룻밤 자고 가셨다.


외삼촌은 한국말을 몇 마디 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 다음 해인


1972년 큰 외삼촌을 초청하였고


우리는


1975년 초청받아 가게 되었다.


큰 외삼촌과 우리 가족이 각각 3개월 즈음


작은 외삼촌 집에 거주 하였으니 아마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20여 년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마감 될 때


몇 년 동안 방황하는 삼촌을 잠시나마 보았었고


자녀들이 어머니 쪽으로 가서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한국 여성을 만나 다시 새 출발하여 두 딸을 낳았고 의사들로 키웠다.


난 육개월 외삼촌집에서 지낸 덕택에 잘알게될 기회가 있었다.

 

성격과 모습이 사근사근하고 상냥하고 붙임성 있어

 

 

누구라도 좋아할수 있는 성품 이였다.

 

 

아주 가정적이였으며 자상하고 부지런 하여

 

 

그당시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와는 대조적 이였다.

 

 

두딸의 뒷바라지로 미술학원, 발레리나, 바이올린,

 

 

아들하나는 축구와 다른 운동으로 분주해

 

 

자기에 대한 시간은 없었는것 같았다.


난 토요일 아침이 제일 좋았고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어 가끔 머리에 떠오른다.

 

 

육계피향기의 팬케이크 pancake (미국 빈대떡) 가

 

 

은은히 집안에 퍼지면서 브드럽고 조용한 크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다 같이 가족이 말하면서 아침을 즐겼었다.

 

 

나도 두딸의 밸레에 ballet 하는데도 가보고

 

 

미술학원, 오케스트라 ochestra, 축구경기장,

 

 

집안 쓰레기 버리는곳, 외삼촌이 좋아하는 차파는샆 tea shop 등

 

 

을 같이 가끔 동행 했지만 항상 바쁜 생활이였다.

 

 

아마 내마음 한 구속에는 미국에서 자녀들을 어떻해 키우며

 

 

가정을 꾸려 나가는 지혜 등으로 작은외삼촌이

 

 

 

멘토르 mentor가 되었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