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찾은 작은 외삼촌
일사후퇴 때 피난길에 오른 외할머님은
큰 짐을 머리에 이고 오면서 뒤쳐지시고
열 살 된 작은 외삼촌은 작은 가방을 들고 제일 앞에서 걸었다.
앞장 선 작은 외삼촌은 다리를 먼저 건너갔지만
아군이 후퇴하면서 그 다리를 폭파시켰고
뒤늦게 온 나머지 가족이 다리에 도착해
몇 일간 끊긴 다리 주변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차 후
자세한 내막을 알아 본 즉
외할머니와 자녀들은 대동강 이남에 있었고
미군이 저녁 즘 탄약과 무기들을 평양 비행장에 폭발시켜
천지가 울리 듯 평양 전체의 지축이 흔들렸다고 한다.
계속 터지는 폭음에 가옥 들은 흔들리고
온 식구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고 한다.
외할머님은 우선 간단한 보따리를 추스르며
하루 이틀 피신했다가 다시 돌아올 예정으로 밤에 떠났으나
계속 남쪽으로 향하는 철로 길을 오는데 갈수록
피난민들이 늘어나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다고 하신다.
그러나
작은 외삼촌은 제일 앞서 걸어갔고
외할머님은 큰 보따리의 힘겨움으로 뒤쳐 져 있어
간 혹 식구들이 모였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고 하신다.
가끔 길이 기찻길과 마주 치던가 평행으로 늘어선
미군의 군용차들의 행 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족이 눈보라가 희날리는 추운 겨울에 가끔 피난간 빈집을
찿아 숙박했고 식량을 구할려고 사방으로도 다녔다.
없으면 기차길 가까이도 있었으니 너무 험난한 길이였다.
어머니도 당시 열두 살
혼자서 길 가까이 걸어가는데 미군용 트럭이 잠시 세워
어머니 혼자 인 줄 알고
미군 한 병사가 내려 둘러보았으나
어머니는 무서워서 숨었다고 한다.
한참을 먼저 기찻길을 걸어간 외삼촌은
터널에 도착하게 되는데 미군들이 후퇴하면서
피난민들을 막고 터널을 폭발시켰다.
늦게 온 나머지 식구는 모여서 주위를 찾다가
외할머님은 혼자 식구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다시 온 길을 향해 외삼촌을 찾았다고 한다.
기찻길 먼저 걸어간 작은 외삼촌은 터널위로 올라가서
기다렸다가 이렇게 이틀 간 엇갈려
작은 외삼촌은 미군 병사가 군용트럭에 태우고
미군기지로 왔다.
미군 기지인 문산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2년 여간 있다가
한미군병사의 양아들로 입양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미군 병사가 제대하고 정착한 곳은 뉴욕 퀸스 였다.
외삼촌은 미국 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던 사정으로
미국의 중학교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남들이 상상 할 수 없는 노력이 뒤 따랐으리라 생각된다.
양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거처를 자주 옮기었고
학교 또한 자주 전학을 다닐 수밖에 없어
친구를 사귈 여건도 녹록하지는 않았기에
작은 외삼촌의 어려움은 차츰차츰 더 해 갔다.
그러다
양아버지가 정육점을 하시게 되고
외삼촌은 방과 후 시간 날 때 마다
양아버지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어느덧
고등학교는 끝나고
양아버지는 자기 일인 정육점 일을 계속 도와주길 바랐고
외삼촌은 공부가 더 하고 싶었다.
그 의견 충돌로 심한 다툼과 육체적인 고통으로
외삼촌은 혼자 독립을 하게 되었고
생계 해결과 동시에 그동안 키워준 보상을 하라는 빚 갚음에
더 고된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굳은 의지와 욕망은
힘들면서도 작은 외삼촌을 버티게 하는 희망이었다.
작은 외삼촌의 하루 일과는
종일 일하고 야간 대학을 가서 공부를 했다.
외삼촌은 혼자서
생계유지 뿐 만 아니라 대학 학비와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항상 고된 일을 하게 되었고 또한 그로 인해 늘 가난과 싸워야 했다.
몇 년의 긴 고생으로
빚은 청산 했으나 학업의 진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덴마크 여성을 만나
연고자가 없어 결혼은 덴마크에서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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