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골 생활의 시작
한국에서는 미술과 역사를 좋아했고 미국에 와서는 수학과 과학으로 전환된것은
아마도 한국과 미국의 공통점이 되는 과목이 된 영향도 없지 않아 있을것이다.
그래서 문학, 언어하고는 항상 거리가 멀었으며 부족함을 항상 느껴왔다.
한글쓴지도 중학교3학년때고, 지금으러는 오래전 옛날이고,
지금 일하는 분야도 영문을 간단한 이매일을 주고받을 정도이니 문법, 철자가 틀리고
나의 짧은 글자와 좁은 소견으로 용기내어서 불러그를 만들고
표현하니 너그럽게 양해를 구합니다.
저 경험담, 생각들 그리고 앞으로 할일들을 서로 나누고자 하는 욕망에 시작을 했습니다.
어릴때 꿈은 배만드는사람 이었습니다.
아버님이 군대출신이기에 나는 강원도 양구 방상면에서 태어나서 4년간 지냈는것같다.
몇가지 기억 중에 민간인으로 살수있는 최 전방이어서 전기나 수도물이 않들어 왔으니
어머님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된다.
그리고 대구에 정착하면서 한동안 어머님이 같이 동행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길 걷으면서 신기한것이 많아서 자주 큰소리로 손가락을 가르키며 물어봐서이다.
거처는 대구 중구 동인동 으로 기억하며 동인국민학교를 5학년반까지
다니다 서울로 이사를갔다.
집은 앞마당에 큰포도나무가 있어 경관과 그늘도 만들어 주었고
코너에는 큰 감나무가 있고 담너머로 다니는 국민학교가 있어 가끔
감나무 위로 올라가서 학교를 보곤 하였다.
대구에는 이모님이 계셨으며 사촌 5명중에 막내가 나하고 한동갑이라
한때는 한반에 있었고 같이 바둑을 한때는 자주두었는데 한번도 이긴적이 없었다.
나중에 그친구는 서울대학도 가고 바둑 초단실력까지 되었으니 바둑
잘두는것 하고 머리좋은것 하거는 비래되지않나 본다.
내기억으로는 이모님집은 가난했었다 그러나 이모님의 엄청난 헌신과
자녀분들의 똑똑한 두뇌와 노력으로 훌륭한 교육 집안으로 되었다.
모든 자랄때 추억이 대구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할머니 고향인 진해도 두번 가보았으며 바다가의 게들이 썰물때 구멍에서
나와서 합창 댄스를 하는것이 지금도 보인다.
3-4학년 여름방학을 아버님 고향인 진주를 혼자가서 사촌형님들 하고
남강에서 등에 엎혀 수영하던 기억도 되살아난다.
그러다 어느날 갑작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한동안 대구에 친구들,
이모님과 사촌분들, 생활이 꿈에도 나타났다.
마포구 대흥동에 살았으며 창천국민학교를 맞치고 연희동에있는
경성중학교를 다니다 중3때 미국으로 오게 되었음.
작은외삼촌 권고로 그당시 IBM 엔지니어로 일하셨고, 30년 넘게 일하신거로 생각된다,
자녀들 교육에도 지금있는 시골이 뉴욕시티 보다 나은면이 많타고 해서 정착을 했다.
가족이 작은 외삼촌집에 2달간 있다가 아파트로 옮겼고 나는 3달 더있다가 가족들과 합쳤다.
미국 시골 생활은 너무나 달랐다.
우선 차가 없으면 꼼짝도 못 할뿐더러 사람들의 왕래도 적었다. 그래서 모든거리는
차로 얼만큼 걸리는것으로 말한다.
미국의 시골생활 이야기를 천천히 여기서 시작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