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골 나들이- 뉴욕시티 프러싱으로
뉴욕시티 내혼자 처음으로 간것은 대학교 다닐때,
겨울방학(1981년)동안 친구집에, 일주일 놀러 갔었다.
그전엔 큰외삼촌이 가끔 운전해서 맨해턴Manhattan)에 있는
삼복식품에 장을 보았었다.
퍼킵시(Poughkeepsie)에서 기차를 타고
종점인 그랜드 센트럴 스태이션(Grand Central Station)에서 내려
마중나온 친구하고, 지하철을 30분 타고
도착한곳이 프러싱(Flushing)이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서 유니온 상가에 도착하니
간판들과 상점들이복잡하게 나열 되어 있어,
여기가 한국인가 하는 느낌이였고,
미국에도 이런대가 있는것이 의아하고 기분이 좋았다.
친구가 만화방에 잠시 들린다는 말에 옛날 추억이 눈앞에 아련 거렸다.
만화방은 2층에 위치했으며, 몇사람 앉는 테이블이 있었고
큰 리빙룸 공간에 만화책, 무협지 그리고
작은양의 소설책이 적은 도서관처럼 책장에 나열되어 있었다.
만화방을 나오면서 친구가 여기는 기원도 있다고 해서
수많은 간판사이에 바둑 표시가 있는곳에 내눈은 주시되고 있었다.
1986년 가을에 친구 소개로 1년간 롱아일런드 (Port Washington) 에
취직해서 자주 친구들과 프러싱에서 만남을 했고,
한인들의 코리아 타운이였다.
프러싱에서 살면 한국에서 생활과 거의 비슷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 가반수는 미국에 오래 살았어도 영어가 서툴었다.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한국 회사에 일하게 되었고,
주로 업무는 그당시 한국 대기업 현대, 대우에 필요한 기계, 전자품을
미국회사에 알아봐서 좋은 가격과 시일내에 납푼 해주는것이였다.
그런데 한국회사는 대체적으로 일은 미국회사에 두배나마 되나 임금은 적으니,
한국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후 마음만 내키면 적어도 일년에 3-4번 주말을 통해 왕래를 했고,
마침 한친구가 만화방도 해서 더자주 놀러 가면서
만화도 빌리고 한아름 마킷에서 부모님과
같이볼 비디오도70개쯤 빌려가고 한국식품도 구입했다.
한아름에서는 한국 식품이 다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추억의 붕어빵, 순대, 뻥티기 과자, 해삼, 멍개
그리고 다양한 밑반찬도 있었다.
수십군데의 한인식당, 밤거리의 술집들..
그런뒤 20년전쯤 만화방 하는 친구동생한테 이발 괜찮게 하는
한국 이발관이 있냐고 물으니 우리이발관이 잘한다며 옛날식으로
깎는다고, 한블락만 걸으면 된다고 해서 갔습니다.
가니 연세가 드신분이 하시는데 바리깡도 않쓰시고 가위만으로
머리를 깎는데 그렇게 잘하시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마치 피아니스트의 손이 않보일정도로 부드럽게 연주를 하듯이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마싸지하고 다듬고 깎는 느낌을 받았다.
하고나면 온머리가 상쾌할 뿐더러 몸전체가 쉬원한느낌.
그런후 아법님이 좋아할실것 같아서 같이 동행을 했는데
아법님이 너무 만족 하셔서 지금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계속 가게 되었습니다.
이발소 하시는 분은 외정시대 부터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후 6주마다 나들이, 토요일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
8시반쯤 금강산 식당에 도착, 아침 식사를 한후
우리이발관으로 가서 1시간쯤 이발한후, 한아름과
아씨 플라자를 들린후 집으로 오면 오후 2-3시가 되는 일과였다.
그러부터 15년전에 주인이 바뀌었어도 계속 가게 되었고
2-3년전 부터는3달마다 하는 나의 시골에서의 나들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처음 갔을때의 한국타운은 프러싱 메인스트리 Main street가
중심이였는데 중국 사람들에의해 계속밀려서 유니온 상가도
얼만큼 유지할지 모르는 실정이다.
중국계통은 우선 건물부터 구입하면서 뿌리를 내리니..
우연히 발견한, 지금도 다니고 있는 우리이발관 기사가 실렸습니다.
가위질 52년...단골 있어 아직은 버틸만해요
우리이발관의 천혁기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손질하고 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계단을 굽이굽이 걸어 올라간
뒤 철문을 열자 영어회화 강의가 흘러나온다. ‘잘못 찾아왔나’ 하는 순간 한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베테랑 이발사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10년 넘게 우리이발관을 이용하는 타인종 손님이 4~5명 정도 되는데 영어가 짧으니까 말이 안 통하잖아요.
은퇴하기 전에 그동안 고마웠다며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나이 칠십이 다돼서야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했는데 쉽지 않네요. 허허허~” 퀸즈 플러싱 유니온스트릿 선상에 위치한 우리이발관을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천혁기 이발사.
이제는 대표적인 사양업종이 돼버린 이발관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천 이발사는 경력 52년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이발 역사의 산증인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쫄쫄 굶었던 1960년대 보릿고개 시절에 입에 밥풀이라도 칠해보자는 생각에 열여덟에 시작한 이발사일이 평생 직업이 됐다.
한 때는 ‘한국에 가서 다른 건 다 못해도 이발관은 꼭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고의 기술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호황을 누렸던 이발관은 1994년 IMF위기 이후 퇴폐업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각 집마다 부인들이 남편과 자식들을 이발관에 보내지 않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절반 이상 줄어버렸고,
미용사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세련된 기술로 이발사들을 앞서나가기 시작하면서 단골 손님들마저 미용실에 빼앗겨 버렸다.
여기에 이발 기술을 배우려는 후계자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서 사실상 명맥이 끊겨버렸다.
“오죽했으면 짜장면 배달원을 했으면 했지 이발 기술은 배우지 말라는 애기가 나왔겠어요.
돈이 안 되고 미래가 불투명한데 누가 기술을 배울라고 했겠어요”
제2의 인생을 꿈꾸며 13년 전 뉴욕에 왔지만 이곳에서도 이발사의 미래가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를 포함해서 플러싱 지역 이발사들이 다 60세 이상이예요.
이 분들이 죽고 나면 이발관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거죠. 상상만 해도 너무 안타까워요”
이제는 젊은이들을 한 명도 볼 수 없는 이발관이 됐지만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아직도 그의 가위질에
매료돼 찾아와주는 단골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개업 첫날부터 10년 넘게 우리이발관을 이용해 오고 있다는 단골 함재균씨는
“제게는 단순히 이발사가 아니라 아버님 같은 분입니다.
제사업이 어려웠을 때는 1년 넘도록 절반 가격밖에 받지 않으셨고,
자식들과 함께 올 때는 오히려 아이들이 용돈을 받아 갈 정도였으니까요.”
‘이발사는 가장 정직하고 양심적인 직업’이라고 강조한 천 이발사는
“보스턴과 뉴저지에서 톨비를 내면서까지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을 보면 너무 고맙고 힘이 됩니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이분들이 저를 기억하고 찾아와주니 저는 이 세상 누구보다 부자 입니다.” <조진우 기자> 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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