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우리가 결혼을 1990년5월에한후 12월이 다가오면서
새 가정을 이루었으니 인사도 할겸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기로했다. 우리는 장남 장녀고 밑으로
둘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또한 공교럽게도 아버지, 장인, 외삼촌 세분이 연세도
같았고 월남전에도 참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느분도 술을 못 마신다.
외삼촌 내외는 할머니를 모시고 딸둘과 아들 하나였다.
외삼촌은 늦게 결혼하셔서 큰딸이 나보다 12살 연하이다.
그러니 선물줘야 될 사람은 양쪽집 4명씩 그리고 외삼촌내
6명해서 도합 14명이였다.
종이에다가 명단을 짜서 대강 얼마짜리,
어떤 선물들을 살건가 서로 상의하고
반쯤 짜였을때 주말을 통해 시장을 갔다.
우리 예산은 어른들은 40-50불 선에서 나머지는
20-30불쯤 괜찮은 선물을 보기 시작해서 몇개를 사고
다음 주말을 기다렸다 더 사고 해서 크리스마스전 주말까지
어느정도 선물들을 장만해서 포장하는건 내처가 했다.
몇년을 그런식으로 하고 그런사이에 아들 둘도 생기고
맞벌이 부부라 애들은 어머니가 보셨다.
미국와서 처음산 집에서 살면서 부모한테 방세와 애들
돌보는 비용을 지불했다.
한동안 같이 선물을 사다가 12월달이 접어들면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시간과 돈이 만만치 않했다.
나는 와이프가 선물을 준비하라고 했으나 와이프 성격이
태평한지 태만인지 모르나 내가 나서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러길 10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내여동생도 결혼해서 딸이
생겼고 처제도 결혼후 아들과 딸을 가져서
19명으로 늘었고 더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몇번이나 해마다 이런일은 여자가 더 잘하니
당신이 좀 맡아서 해보라고
9월달 부터 선물을 4-5개씩 매 달마다 사면
그렇게 어렵지 않겠느냐고
달래고 설명하고 성질도 내 보였지만 내처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태평했다.
항상 내가 개입해야 되고 마지막 날까지 선물을
자주 사야되었고 해서 우리애들 까진 못했다.
마침내 처남이 장가가고 두딸과 아들을 가지니
23명으로 되었고 우편배달원등 2-3명이 더 추가 되었다.
그부터 11월달이 되면 스트래스가
쌓이기 시작 12월의 크리스마스면 두렵고, 골치아프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급기야 이대로 가면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데로 낭비가 많았다.
나는 25년 경험으로 알맞는 선물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건지 누구보다 잘안다.
미국에 살면서 보통 집에는 필요한것이 거의 없고
가끔 필요한것을 짐작해서 주기란 쉽지가 않았다.
나는 간단한 일주일에 한번 음식쇼핑은 하나
보통 선물사기 위해 쇼핑몰은 30분만 있어도
이상하게 눈에서 피곤이 먹저 오면서 서서히
몸도 무거워 지는 것을 느낀다.
아마 각종의 전시된 물건들의 색깔과 조명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된다.
오히려 중노동을 하는게 났다는 생각도
여러번 해보았다.
더 이상 이데로 가면 않되겠다는 생각에 10년전에
내가 선언을 해야 되었다.
어른들과 애들만 선물 대상이 된다고
그후 16명이 되어서 한숨은 조금 쉬게 되었다.
내가 알기론 크리마스 선물은 처음 100년전쯤 미국에서
어느 한 여성이 카드를 만들어 보내면서 부터 시작
장사하는 사람들의 발빠른 동작에 부축여 홀마크란
카드회사가 생기고 상업화 되어서 미국에서는 제일 큰
명절로 자리를 잡았고 어떤회사는 일년 매출의 반이
크리스마스 계절에 의존 될 정도니 경제적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명절을 맞아 부담없이 가족, 친척이
모여서 즐겁고 화목하게 보내야 된다고
보는 내생각이고 여러면으로 생각했지만
좋은 해결책이 않보인다.
내 생각으로는 애들만 필요하다고 하지만
어른들을 빼면 무시한다는 생각을 할것같고
이대로가면 하나도 즐거운 명절이 아닌것 같고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지
25년간 해 왔으니
5-10년 더 남았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나폴리 Monopoly Game (0) | 2017.01.05 |
---|---|
어느 그림 (0) | 2016.12.31 |
나의 안식처 (0) | 2016.11.27 |
첫눈 (0) | 2016.11.22 |
선후배가 없는 나라 (0) | 2016.09.02 |